번역이란 무엇인가 - 살림지식총서 338
1. 소개글
번역에 대한 관심이 날로 늘어가고 있다. 번역사를 꿈꾸는 사람도 많고, 좋은 번역이 무엇인가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도 많다. 하지만 기본의 번역 관련서들은 지나치게 이론적이어서 쉽게 다가갈 수 없거나, 지나치게 후일담 중심이어서 체계적인 이해에 큰 도움이 안되는 경우가 많았다. 추상적이거나 어렵게 느껴지는 번역이론서들, 그리고 쉽게 읽히지만 번역의 전체 그림을 바라보기에는 부족하게 느껴지는 후일담들 사이에 다리를 놓는 이 책은 번역의 이론과 실제를 동시에 접하여 번역의 큰 그림을 그리고자 하는 독자들에게 안성맞춤이다.
2. 저자 소개
이향
국제회의 통역사. 한국외국어대학교 통역번역대학원 한불과 강사.
파리통번역대학원(ESIT)을 거쳐 한국외국어대학교 통역번역대학원에서 「번역물 감수의 심층분석을 통한 번역교육 응용방안 연구」로 박사학위 받았다. 역서로는 『번역론 - 번역에 관한 철학적 성찰』(공역)이 있으며, 논문으로는 「번역능력이란 무엇인가?」 「베르만의 형태의(Lettre) 개념 속에 드러난 번역가의 정체성」 등이 있다. 번역의 실무와 이론, 그리고 번역교육이 서로 더욱 긴밀하게 소통할 수 있게 하는 연구에 관심이 있으며, 한국의 번역담론에서 종종 누락되어 온 비영어권의 번역론을 소개하고 국내 담론에 부재하는 철학적·해석학적 번역론으로 연구의 영역을 계속 넓혀가는 것이 목표이다.
3. 본문 소개
현재까지 번역과 관련하여 제시된 담론들을 살펴보면, ‘번역’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으나 실제로는 번역현상의 극히 일부에 국한되는 내용을 다루고 있는 경우가 많아 특정영역, 특정장르의 번역이 마치 번역 현상의 전체를 대변하는 것처럼 간주되는 경우가 많다. 문학번역만을 해 온 번역사가 번역에 대하여 이야기할 때는 ‘번역=문학번역’이 되고, 영상번역전문가의 번역론에서는 ‘번역=영상번역’인 것처럼 오해된다. 물론 이러한 시각들은 각 개인들의 구체적 체험들을 토대로 한 소중한 자료들임을 부정할 수 없으나, 실제 현실 속에서 번역은 지극히 다양한 양상으로 드러나며 그 다양한 양상 역시 끝없이 변화하고 있다는 사실이 종종 간과되곤 한다. 이탈리아 시인의 명시를 번역하는 작업과 계약서를 번역하는 작업이 같을 수 없으며, 한국에서 20년 전 사전을 뒤적여 가며 원고지를 빼곡히 채워가며 번역하던 번역사와 오늘날 인터넷과 각종 전자사전, 컴퓨터 프로그램을 동원하여 번역하는 번역사의 작업이 같을 수 없을 것이다. (4-5쪽)
많은 사람들이 번역을 단순한 언어치환 작업으로 종종 오해한다. 그래서인지 해외에서 오랜 기간 체류했거나, 혹은 외국어 능력이 뛰어난 사람은 당연히 번역을 잘할 것이라고 간주한다. 이는 언어능력(linguistic competence)과 번역능력(translation competence)을 혼동하는 데서 비롯된 것으로, 번역이라는 것을 따로 배우지 않아도 해당 언어를 잘하면 누구나 번역을 할 수 있다는 오해와도 맥을 같이 한다. 이러한 오해는 학문적 차원에서도 예외가 아니어서, 오랫동안 번역에 대한 연구는 언어학이나 문학의 하위범주로 인식되어 왔다. 그러나 오늘날은 이렇듯 번역이 전적으로 ‘언어적 차원’에서만 다루어질 수 없는 작업임이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따라서 철학, 인지과학, 전산학을 비롯한 다양한 분야에서 학제적 차원으로 번역에 대한 관심이 표명되고 있다. (25-26쪽)
유려하고 가독적인 번역으로 이름을 날리던 페로 다블랑쿠르라는 번역가가 있었는데 메나쥐는 1654년경 페로의 번역을 이렇게 비판했다. “그의 번역은 내가 투르에서 깊이 사랑한 여자를 연상시킨다. 아름답지만 부정한 여인이었다.” 물론 여기서 겉모습이 아름답다 함은 가독성이 뛰어나고 매끄러워서 번역한 티가 나지 않는 번역을 말하며, 부정하다 함은 원문에 대해 충실하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번역사 입장에서 볼 때는 참으로 신랄하고 가혹한 비판이 아닐 수 없다. ‘당신의 번역은 유려하고 아름답지만 원문에 전혀 충실하지 않으므로 좋은 번역이 아니다’라는 말을 수사적으로 표현한 것이 아닌가. 이후 ‘아름다우나 부정한 여인’이라는 표현은 가독적이고 매끄러우나 원문에 충실하지 못한 번역을 일컫는 말로 널리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여기서도 역시 충실성과 가독성이라는 두 가치는 공존하기 어려운 것으로 암시된다. (32-33쪽)